나보다 조금 더 잘나가는 FILA 윤윤수...

about 인물 2008. 3. 23. 13:27 by 잔명

의외로 샐러리 맨 계열에서는 굉장히 형님 대접을 받으시던 분이던데...

그런데 왜 조금 잘나가면 머리카락이 그리...... 쩝!! 난 머리가 너무 많아서 안되는 것인가!

아래는 조선일보에서 발췌한 것입니다.(발췌는 무슨~~~~ 뭐 그냥 예전 학교시절의 편집기술이 되살아난 것뿐!!)

약속 시간 12분 전, 윤윤수 휠라(Fila) 회장이 인터뷰 장소인 서울 프라자호텔에 나타났다. 약간 벗어진 머리, 낮고 굵은 바리톤 음성. 그는 지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지각하는 직원의 경우 보너스에서 5%씩 깎기도 했다. 심지어 그의 사무실 시계는 5분 빨리 간다.


그는 남들보다 빠르게 생각하고, 세상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휠라그룹의 일개 투자법인(휠라코리아)을 경영하던 그가 지난해 3월 '몸통' 격인 휠라 본사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휠라가 어떤 브랜드인가? 1911년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세계 5대 스포츠 브랜드로, 전세계 70여개국 1만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로부터 1년 후, 윤 회장이 이끄는 휠라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 달여에 걸친 미국 출장을 마치고 최근 돌아온 윤 회장을 지난 17일 만났다.

그는 전세계 70여개국 18개 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앞으로 매년 최소 4000만 달러의 로열티를 받게 된다. 그뿐 아니다. 휠라 브랜드를 쓰는 기간을 반영구적으로 연장해 주는 조건으로 앞으로 들어올 로열티의 절반 정도를 선금으로 받았다. 이 돈으로 휠라 인수 때 썼던 단기차입금 2억 달러를 모두 갚았다. 윤 회장은 "한국 사람으로서 글로벌 브랜드를 이끌고,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 전세계로부터 로열티를 받는다는 게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윤윤수 휠라(Fila) 회장은 1984년 신발 공급업자로 휠라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휠라는 의류 중심이었고 신발은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휠라 브랜드에 한국의 신발 산업을 접목시키면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본사를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지만, "약속이 돼 있지 않다" "거래하지 않겠다"며 10번 넘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던 그가 휠라 본사를 '접수'한 것이다. 미국 사모펀드인 서버러스 컨소시엄(SBI)에 넘어갔던 휠라를 지난해 3월 4억 달러에 사들였다. 휠라코리아 사장 시절 국내 최대 연봉 샐러리맨으로 화제가 됐던 윤 회장의 신화가 글로벌 브랜드 신화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이달 초 윤 회장은 해외 라이선스 계약까지 마무리했다. 그는 앞으로 매년 최소 4000만 달러의 로열티를 받게 된다. 로열티를 주는 업체 중엔 일본의 대형 종합상사인 이토추도 포함돼 있다.

그는 특히 휠라 브랜드를 쓰는 기간을 반 영구적으로 연장해 주는 조건으로 앞으로 들어올 로열티의 절반 정도를 선금으로 받아 차입금 상환에 썼다. 매년 매출의 7~8%를 받던 로열티를 4%만 받되, 나머지 부분은 현재 가치로 환산해 일시금으로 받았다. 신종 금융기법인 셈인데, 경영진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휠라는 전세계적으로 라이선스를 줬지만, 휠라 USA와 휠라코리아는 직영하고 있다.)

―해외 라이선스 계약을 다 끝냄으로써, 올해가 글로벌 휠라 출범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느낌이 어떠십니까?
"시원하네요. 라이선스 문제는 작년 말에 끝낼 계획이었는데, 서브프라임 여파로 유럽 지역에서 좀 지연이 됐어요. 돈줄이 얼어붙어 기업들이 투자를 잘 안 하려는 상황이었죠. 한국 사람으로서 글로벌 브랜드를 이끌고,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 전세계로부터 로열티를 받는다는 게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7시15분이면 출근한다. 하지만 휠라의 경영 정상화는 집념의 경영인 윤윤수에게도 일생일대의 도전임에 틀림 없다.

윤 회장이 인수하기 전 휠라 미국법인(휠라USA)은 고가(高價) 라인 위주 마케팅과 소매 중심 영업 등 당시 미국시장 상황에 맞지 않는 경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휠라 USA는 지난해 42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한때 14억달러에 달했던 전세계 휠라 매출은 지난해 8억달러에 그쳤다.

―휠라가 미국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언제쯤 턴어라운드(실적 개선)할 것으로 전망합니까?

"적자투성이인 미국의 매장 중 18개를 정리하고, 인력을 감원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작년에 42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한 것도 이 때문이었죠. 직영 매장 일변도이던 유통구조를 바꾸어 대형 유통업체와 계약을 맺고 도매 공급 비중을 크게 늘렸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재고 부담이 줄어들었습니다. '코올스'같은 유명 백화점과도 납품 계약을 했습니다. 코올스에게는 '휠라 스포트(Fila sport)' 브랜드의 라이선스를 줬습니다. 휠라 입장에서는 새로운 수입이 생긴 거죠. 이런 노력 끝에 올해는 500만달러 흑자 전환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휠라 관계자는 "지난해 미국 매출이 6000만달러였는데, 올해는 이미 9400만달러 상당의 주문이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순이익도 지난해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맞추던 것이 올해는 4000만달러 흑자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는 마케팅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미국에서 스포츠 브랜드 시장은 흑인들이 주도한다. 1월 새 스포츠 신발을 출시하면서 흑인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 흑인 래퍼 허리케인 크리스를 모델로 내세웠다. 그가 부른 노래가 히트하면서 흑인 사회에서 제품이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고, 출시 한 달 만에 150만 켤레 추가 주문이 들어왔다.

그는 휠라 인수를 마무리 짓고 경영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무수히 비행기를 탔다. 작년 한 해 동안 23차례 비행기를 탔고, 5개월 가량을 해외에서 머물렀다.


"지금까지 대한항공 비행기를 1000번 넘게 탄 것 같습니다. 마일리지가 350만 마일이 쌓여 있어(뉴욕을 248번 왕복하는 거리에 해당한다) 아내는 돈 주고 항공권을 구매하지 않습니다."

윤 회장은 세계 시장을 남미, 중국, 일본, 유럽·아프리카 등 크게 4개 권역으로 나눠 각 지역의 대형 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중국은 합작법인). 일본 이토추, 브라질 다스그룹 등이다.

―앞으로 휠라를 어떻게 키워나갈 계획이십니까?
"휠라를 스포츠 브랜드의 '빅3'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입니다. 앞으로 3년 내 글로벌 매출 15억달러를 달성할 계획입니다.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것도 검토 중입니다. 장기적으로는 휠라를 발판으로 '한국판 루이뷔통'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을 인수해 운영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Think globally, but do locally!(사고는 세계적으로, 실행은 그 지역에 맞게)'를 강조해 왔습니다. 나라별로 상황이 다른데, 세계 전 지역을 본사에서 일일이 다 관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예전에 휠라는 지역 라이선스 업체의 경영에 지나치게 간섭했어요. 하지만 이제 휠라의 뿌리가 된 한국과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만 직접 관리하고, 나머지는 라이선스 업체들이 지역에 맞는 마케팅 활동을 펼칠 것입니다. 다만 의류의 경우 20~30%, 신발은 70% 정도를 전세계에 동일한 제품을 공급해 통일성은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회사들은 로열티를 선불로 지급했으니 본전을 뽑으려고 알아서 열심히 하겠죠."

라이선스 체제로 가면 품질 관리가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R&D(연구·개발)와 금융의 중심인 미국, 그리고 라이선스 관리 센터인 한국만 잘 지키면 글로벌 시장 관리는 어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휠라USA 기존 조직도 최대한 살려뒀다. 휠라USA의 CEO는 휠라USA 사장을 역임했던 미국인 존 엡스타인으로 20여년간 알고 지낸 사이다. 2000년 윤 회장이 미국에서 심장협심증 수술을 받았을 때 엡스타인이 자신의 사촌을 집도의로 소개해 준 인연이 있다.

"외국 기업을 인수했다고 해서 점령군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다가는 반발감만 키우고, 결국 문화적 장벽에 갇히게 됩니다." 다만 휠라USA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윤 회장 아들(33)과 지주회사를 맡고 있는 조영찬 사장을 포함해 4명의 한국인이 미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휠라코리아가 휠라 본사를 인수한 것은 꼬리가 몸통을 흔든 격인데요,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2006년 8월부터이지만, 그 전부터 '본사를 인수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 본사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되지도 않는 상품을 만들어 각 지역 법인에 강매를 하기도 했죠. 휠라 브랜드가 매물로 나오고 나자 '다른 곳에 인수될 경우 휠라코리아가 보호를 받기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휠라를 인수했던 서버러스는 투자회사이니, 경영보다는 투자비 회수가 더 큰 목표였습니다. 휠라 인수를 놓고 마지막에 2곳과 경합을 했는데, 서버러스 쪽에서 오히려 '투자비(3억9800만달러)만 회수할 수 있으면 휠라를 잘 아는 윤 회장에게 넘기고 싶다'고 얘기를 해서 쉽게 풀렸습니다."


앞의 신발 이야기로 돌아가면, 휠라에 신발 장사를 제안한 윤회장의 아이디어는 결국 채택돼 휠라는 신발 사업을 펼쳤고, 의류 매출을 뛰어넘을 만큼 장사가 잘됐다. 윤 회장의 능력을 인정한 휠라 본사는 1991년 한국에 투자법인을 세우고 그를 CEO에 앉혔다. 휠라코리아 실적은 날개를 달아 전세계 라이선스 업체 중 단연 독보적이었다. 휠라그룹 엔리코 후레쉬 전(前) 회장은 "휠라는 이탈리아에서 탄생했지만 성장은 한국에서 이뤄졌다"며 "전세계 휠라인들은 휠라코리아를 본받으라"고 말했다.

―요즘 휠라 경영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갖고 있는 정보를 직원 모두와 빠른 시간 내에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를 혼자만 독점하겠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사장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직원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회사가 잘될 수 없습니다. 저는 해외 출장을 갔다 오면 직원들에게 결과를 브리핑합니다. 정보 공유를 위해서는 조직 내 상하좌우 커뮤니케이션이 관건입니다. 이제 글로벌 경영을 해야 되니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는 매일 수시로 휠라USA 책임자들과 통화를 한다. 인터뷰 중에도 미국에서 업무 보고를 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글로벌 브랜드의 회장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험난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돼 장티푸스로 어머니를 여의고, 고2 때는 아버지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의사가 되고 싶어 서울의대에 지망했지만 세 번 낙방하고,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3학년 때 시험 시간에 공부 안 한 친구가 그와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다 발각돼 1년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는 "그때 내 인생은 암울했다"고 말했다. 군 제대 후 해운공사에 취직하며 사회에 진출한 게 나이 서른.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하며 배운 영어와 뚝심으로 미국 백화점인 JC페니와 신발업체 화승에서 각각 바이어와 영업맨으로 활약하며 성공 신화를 써가기 시작했다.

―역경을 딛고 성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작년 미국 볼티모어 물류 창고에 갔을 때였어요. 한 흑인 직원이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우선 정직해야 된다. 성실하고 참을성이 있어야 된다.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는 부족하다. 운이 따라야 된다.' 이렇게요."

그는 1996년 연봉이 18억원이라고 공개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전문경영인 중 1위였다. 그는 가장 많이 받을 때는 33억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돈과 부(富)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저는 제가 번 돈에 대해 떳떳합니다.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은 부의 축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반(反) 부자 정서가 있는데, 부자들 책임도 있습니다.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가 필요한 사람과 적절히 공유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연봉을 받으면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절반 중 또 반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과 나눴습니다. 연봉이요? 월급 사장 시절, 제가 나서서 그만큼 달라고 했으면 오너 회장이 줬겠어요? 회장이 나를 그렇게 평가해준 거죠. 제가 돈을 벌려고 아옹다옹한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다 보니 돈이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005년 휠라코리아의 외국인 지분을 모두 인수하고 명실상부한 오너가 되면서 연봉을 5억원으로 낮췄다. 차도 벤츠600에서 렌트한 체어맨으로 바꿨다. 지금도 그 체어맨을 타고 다닌다. 그는 "회사 실적을 높여 높아진 주가와 배당으로 당당히 보상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한 기업인인 그이지만, '좋은 가장(家長)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듯했다.
"특히 아내에게 미안해요. 아내는 제가 회사를 옮길 때 타자기로 제 이력서를 타이핑해줬죠. 때로는 회사 경리가 됐고, 사업이 어려울 때는 저 대신 돈을 꾸러 다니기도 했어요. 이사를 많이 다녔지만 이사하는 날 도운 기억이 없어요. 이삿짐을 챙긴 것은 고사하고 이사하는 날 집에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 회사 근무 시절 비리를 눈감아 달라고 보내온 돈 다발을 당장 돌려보내도록 한 것도 아내였습니다."

그의 명함에는 'past forward(패스트포워드)'라는 빨간색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더욱 희망찬 미래로 전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휠라 본사 인수를 계기로 시작한 기업 캠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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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about 인물 2008. 3. 11. 23:32 by 잔명


생각보다 많이 젊더군요. 한국 나이로 약 67세. 요즘 티베트 강제 진압때문에

화두에 가끔 올라서 갑자기 조사했습니다.

후진타오


중국어간체 : 胡锦涛

중국어번체: 胡錦濤

병 음 : Hu2 jin3 tao1

출 생일 : 1942년 12월

출 생 지 : 중국 상하이[上海]

본 적 : 안후이성[安徽省] 지시현[績溪縣]

아 버 지 : 후징즈[胡靜之]

아내 : 류잉칭[劉永淸]

1942년 12월 출생

1959년 베이징[北京] 칭화대학교[清华大学校] 수리공정과 입학

1965년 4월 공산당 가입

1965년 7월 베이징[北京] 칭화대학교[清华大学校] 수리공정과 졸업

1967년간쑤성[甘肅省] 수력발전소 노동자로 근무

1971년 수리전력부 제4공정국 기관당 총지부 부서기

1971년결혼

1974년 간쑤성[甘肅省] 건설위원회 비서

1980년 간쑤성[甘肅省] 건설위원회 부주임

1982년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서기 및 전국청년연맹 제6기 주석

1984년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85년 구이저우성[貴州省] 당서기

1988년시짱[西藏]자치구(티베트) 당서기

1992년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

1998년국가부주석

2003년 국가주석

2004년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뭐 대충 조사 하니 이럽디다.

나보다 돈 좀 더많은 레노버 창업자 류촨즈....... 天外有天

about 인물 2008. 3. 10. 23:19 by 잔명

뜻밖이었다. 그가 입은 청색 재킷의 오른쪽 옷 소매 끝은 눈에 띌 정도로 닳아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한국의 삼성전자 격인 중국 최대 민영기업 레노버(Lenovo·聯想)의 창업자이다. '중국의 빌 게이츠'라 할 수 있는 류촨즈(柳傳志·64) 레전드홀딩스(레노버의 모기업) 회장이다. 지난 2월 29일 베이징 레전드홀딩스 본사 A동 10층 회장실. 그는 노타이에 콤비 차림이었다. 그는 활짝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우선 해진 옷을 입는 이유부터 궁금했다. "양복은 보통 10년 이상씩 입어요. 제가 검소해서 일부러 아끼는 것은 아니고요. 입는 데 신경을 안 써서 그래요. 솔직히 돈 쓰는 방법을 잘 모르기도 하죠. 어떤 옷이 명품인지도 모르고, 명품 브랜드는 들어도 잘 기억을 못하죠."


중국인들에게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류촨즈 회장이나 장루이민(張瑞敏) 하이얼그룹(海尔)회장 두 사람을 꼽을 것이다. 미국 포천(Fortune)에 따르면 류촨즈 회장이 창업한 PC 회사 레노버는 2006년 146억달러(약 14조원)의 매출을 올려 민영기업 중 1위를 차지했다. (국유기업을 포함한 순위로는 레노버가 중국 11위이다.)


그는 카리스마형 리더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기자가 받은 첫 인상은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였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그는 마치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또 하나 인상은 논리 정연하다는 점. 질문을 하면 "첫째, 둘째" 하면서 차근 차근 풀어나갔다.


중국인들이 류촨즈 회장에 특별히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지난 2004년 17억5000만 달러에 미국 IBM의 PC사업 부문을 인수해 세계의 화제가 됐다. 다윗이 골리앗을 품은 격이고, 한국으로 치면 용산전자상가의 조립 PC 회사 사장이 미국 최고의 컴퓨터 기업을 사들인 격이다. 레노버의 본사는 미국에 있고 CEO도 미국인이다. 연간 2022만대의 PC를 생산하는 세계 3대 PC 메이커이며, 한국을 비롯한 60여 개국에 약 2만5000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세계로 도약하는 중국의 힘을 상징하는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늘 마음 속에 '천외유천(天外有天)'이란 중국 속담을 새기고 다닌다고 했다.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뜻인데, 우리 말로 하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쯤 된다. "제 성격에는 자만(自慢)의 DNA가 흐르고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우쭐해지기 쉬운 성격이죠. 그래서 늘 자만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일깨우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가 끝없이 기업을 확장하고 부(富)를 늘려가는 데만 몰두했다면, 그는 결코 존경받는 기업가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나눔의 경영을 실천해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레전드홀딩스는 레노버의 지주회사로 주식의 46%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레전드홀딩스 주식은 2%에 지나지 않는다. 65%는 그의 창업 당시 자금을 대주었던 중국과학원이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는 임직원이 보유하고 있다. 그는 중국 최초로 스톡옵션(1989년)과 종업원지주제(1993년)를 잇달아 도입해 중국 기업에 소유권 개혁 물결을 일으켰다.


그는 돈과 부(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물질적 부에 대한 생각은 계속 바뀌네요. 10여년 전에는 내가 탄 차가 좋을수록, 내 집이 클수록 사람들이 나를 존경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한번은 차를 타고 가다가 창 밖으로 옛 동료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어요. 정신적인 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즐거운 일은 동료들이 얻어야 할 것을 얻어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창업한 동료들은 지금 다 퇴직을 했지만, 주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회사가 발전할수록 그들도 더 좋은 삶을 누릴 수 있죠."


그는 자신의 주식이 2%밖에 안 된다고 하면 많은 기업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다들 내가 레노버를 창업했고 회사가 이만큼 커졌으니 재산도 많을 것이라 믿죠. 하지만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조직을 단합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영 일선에 복귀할 가능성을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는 지난 2005년 당시 41세의 양위안칭(楊元慶)에게 레노버 회장 자리를 넘겨줬다.


―왜 레노버 경영에서 손을 뗐습니까?


"IT는 젊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단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더 잘 하죠. 우리는 골프나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레노버 미국 본사는 1년에 세번 정도 갑니다. 레노버의 주요 문제 결정에 대해서는 이사로서 의견을 내는 정도입니다. 구체적인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물론 경영과 관련한 보고는 수시로 받죠."


그는 요즘 골프에 푹 빠져 있다. 여름철에는 거의 매일 오전 7시에 집 근처 골프장에서 9홀을 돌고 출근한다. 출근하면 대략 10시 정도가 된다. "최근 들어 저는 일하는 시간을 줄여나가고 있어요. 전문경영인이 있잖아요."


1984년 레노버를 창업한 류촨즈는 이듬해 IBM의 대리점 모임에 참석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양복을 입고 뒷줄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는 얼마 뒤 IBM 컴퓨터의 중국 내 판매 대행에 나서게 된다.

"그러던 우리가 어느 날 IBM PC 사업부를 인수할 줄이야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죠.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러나 2004년 그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레노버가 IBM의 PC사업부문을 통째로 인수했다. 현재 레노버 회장인 양위안칭(楊元慶) 당시 사장이 밀어붙인 일이고 다른 이사들은 거의 전부 반대했지만, 류촨즈는 양위안칭의 판단력을 믿었다.

레노버는 2010년까지 IBM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올해부터 IBM 브랜드를 떼기로 결정했다. 자신감의 표시인 셈이다.

레노버는 요즘 애플(Apple)과 슬림 노트북을 놓고 한판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회장이 지난 1월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이라는 '맥북에어'를 발표하자 레노버는 '씽크패드 X300'을 내놓았다. 무게에선 0.03㎏라는 근소한 차이로 레노버의 X300이 앞섰지만, 두께는 맥북에어에 상당히 뒤졌다 (X300이 1.85~2.34㎝인 반면 맥북에어는 0.41~1.93㎝이다).

류촨즈 회장의 확장욕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레노버는네덜란드 PC업체인 패커드 벨 인수에 나섰다가 경쟁 회사의 견제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는 "기업의 발전을 위해 M&A는 필요한 수단이며 레노버뿐 아니라 어느 기업도 해야 하는 것"이라며 "레노버는 주로 PC 부문 (M&A)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단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1996~1997년 회사가 경영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베이징홍콩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일을 했죠. 그때 책상머리에 새겨둔 글자가 '勿躁(우짜오·조급하지 말자)'였습니다. 회사 상황이 좋아지고 나서는 더 큰 일을 하려면 '弘毅(훙이·뜻이 넓고 굳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긴 목표를 세워 끝까지 견지해야 된다는 뜻이죠." 弘毅라는 말은 지금 그의 사무실에 큰 액자로 걸려 있다.


― 리더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

"우선 목표를 잘 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명확한 목표를요. 미래의 큰 그림을 그려야 회사 구성원을 이끌고 앞으로 나갈 수 있죠. 두번째는 도덕성과 품성을 갖춰야 합니다. 세번째는 감성(感性)입니다. 큰 가슴으로 사람들을 포용해야 사람들이 단결하고, 서로 소통을 합니다. 물론 지적 능력도 필요해요. 리더는 학습 능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있어 자신이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잘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고 했다. "처음 10명과 회사를 세웠는데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한 만큼 나눠줄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응집시키려면 내가 솔선수범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저는 많이 일하면서도 덜 가져갔어요. 그랬더니 구성원들이 잘 따라왔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이런 점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회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뒀어요. 그리고 기업을 하면서 여지껏 파벌을 만들어서 끌어올리고 한 적이 없어요. 파벌이 없으니 '누구 사람'이란 게 없었죠."

그가 남들보다 잘한다고 생각하는 또 한 가지는 사람을 키우는 것을 아주 중시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레노버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제1의 원동력 역시 인재를 중시했다는 점을 꼽았다.

"조그마한 회사에서는 일하는 게, 큰 회사에서는 사람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을 할 때마다 인재 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레노버가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일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인재들이 나왔기 때문인데 이는 '감성'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실적을 모두 나 자신의 공으로 돌리거나, 모든 권력을 내가 행사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습니다."

― 인재 양성 방법이 무엇입니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요. 그리고 업무를 명확히 하고, 책임과 권한, 나중에 가져갈 수 있는 이익을 명확히 합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그들의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것을 '엔진 문화'라고 부르는데, 간부는 큰 엔진이고, 그 밖의 모든 직원들은 큰 엔진과 함께 돌아가는 작은 엔진이 되어야 합니다. 밑의 직원들이 엔진에 따라 움직이는 기어가 되어서는 안 되죠. 이렇게 해야 원동력이 더 커집니다."

― 지금까지 수많은 사업에서 성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 것이죠. 문화대혁명 때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두번째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늘 노력한 것입니다. 목표를 높게 세워야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늘 공부한 것입니다. 책에 나온 지식뿐 만이 아닙니다. 외국 회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미국 회사들의 중국 주재원들은 좋은 스승이었죠."

그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덩샤오핑(鄧小平)을 꼽았다. "그가 없었다면 개혁·개방이 없었을 것이고, 중국은 아주 가난했겠죠. 그리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북한에 가보면 좋겠다"고 했다. "북한에 가보면 아마 크게 놀랄 거에요. 어쩌면 이렇게 가난할까 하고 말이죠. '김일성'이라 부르면 안되고 꼭 '김일성 주석'이라고 부르고, 또 '김정일 장군'이라고 불러야 하니 얼마나 불편할까요."

'류촨즈 식(式)' 경영을 이야기할 때 그가 주창한 '나무통(木桶) 이론'과 '손가락(一個指頭) 이론'을 빠뜨릴 수 없다. 나무통 이론은 여러 개의 나무 조각을 이어 붙인 나무통의 경우 가장 약한 나무조각에서 물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기업의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논리다. 기업이 잘되고 못되고는 가장 약한 부분에 달렸다는 것이다. 또 손가락이론은 가운데 손가락(중지)처럼 길어야 남을 찌를 수 있는 것처럼 핵심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기업이 가장 약한 부분을 보완한 다음에는 핵심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중국 기업들이 너도나도 벤치마킹하는 경영 이론이 됐다.

IBM을 인수한다는 일견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간단합니다. 중국 시장이 이만한 크기로 성장했는데, 이제는 세계 시장에 진출해 세계적인 명품이 돼야 이익을 높이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실력이 있는 기업은 반드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의 삼성, LG처럼 말이죠."

그는 IBM을 인수할 때 3가지의 리스크가 있었다고 했다. 첫째는 레노버가 IBM을 인수한 뒤에도 소비자들이 계속 제품을 살 것이냐는 것이다. 둘째는 IBM의 엘리트 직원들이 계속 회사에 남아 있을까 하는 문제다. 세 번째는 중국과 외국 직원들의 문화 차이를 해결하는 문제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잘 해결됐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지금 해결하고 있는 중인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레노버의 실적이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레노버는 일찍부터 서구식 경영 기법을 도입해 다른 중국 기업과 구별되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한국경제연구원 박승록 박사는 "레노버가 IBM PC부문을 인수하기 전 레노버 본사를 방문했을 때 홍보나 관리 파트 등 여러 면에서 서구식 시스템을 받아들인 한국 대기업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류촨즈 회장은 "외국 선진기업의 노하우와 해외 경영 교과서에 나온 원리를 참고해 우리 실정과 결합해서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외국 회사들은 메뉴에 따라 음식을 잘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늘 상황이 변하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맞는 메뉴를 스스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의 인사 스타일은 서구의 첨단 기업 못지 않게 파격적이다. 철저히 성과와 능력 중심이다. 양위안칭 레노버 회장의 경우 입사 5년 차이던 29세 때 핵심사업인 컴퓨터 사업본부장으로 발탁했고, 2001년에 사장, 2005년엔 회장으로 고속 승진시켰다.

류촨즈 회장은 비즈니스는 3개의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고 했다. '建班子(젠반쯔·핵심적인 관리팀을 세우는 것)', '定戰略(딩잔뤼에·발전 전략을 수립하는 것)', '帶隊伍(다이두이우·직원들을 경쟁력 있는 인재로 키우는 것)'가 그것이다. "이는 기업 경영에 있어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 경영의 처음부터 끝이죠."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덩샤오핑과 함께 아버지를 꼽는다. 조종사 시험에 낙방한 그에게 아버지는 "네가 정직하기만 하면 무슨 일을 하든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격려했다. 그는 이 말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산다고 했다. "중국말에 '生財有道(성차이여우다오·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고 신용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껏 회사를 운영하면서 늘 이 말을 지켜 왔습니다. 이는 레노버를 경영하는데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 됐습니다."


― 조종사가 아닌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기업인으로서 과학기술의 성과로 돈을 벌고 사회에 생산 이익을 가져다 줘 보다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관리에 능하다고 생각하며 기업을 하면서 이런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종사가 안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종사가 안 된 게 다행입니다. 나중에 검진을 통해 알게 된 일이지만, 저는 수면 장애가 있어 아마 좋은 조종사가 못됐을 거에요. (웃음)"

― 많은 창업자들이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갔다가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하곤 했습니다. 그럴 생각이 없나요?

"(단호하게) 아니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회사의 핵심 관리층을 양성해서 그들을 회사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더 좋은 실적을 내려고 하겠죠. 레노버는 '가족이 없는 가족회사'가 돼야 합니다. 가족들이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개인의 재산처럼 되기 쉽습니다. 또 경영권을 가족에게만 넘겨주면 다른 능력 있는 인재를 잃기 쉽습니다. 레노버는 이런 기업이 돼서는 안 됩니다. 직원들이 모두 한 가족이 돼 단합해야 됩니다."

그는 요즘 앨런 그린스펀(Greenspan)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쓴 회고록에 푹 빠져 있다. 책을 보고 나서 10권을 사서 정부 인사들과 친구들에게 읽어보라고 줬다고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두 가지 배울 점이 있다고 했다. "첫째, 한 국가가 빈부 격차 등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성장에 집중을 해 경제 발전을 이룩한 다음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포퓰리즘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인위적으로 평등하게 하려고 하다 보면 아르헨티나·페루와 같은 길을 걷고, 경제가 발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둘째, 시장 원리로 경제를 관리해야 된다는 점입니다.미국 닉슨 시대에 물가가 상승하자 어떤 품목은 값을 올리면 안 된다는 식의 행정적인 수단으로 간섭을 했는데, 실제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답니다. 국가는 사람처럼 하나의 체계로 돼 있어서 머리가 아프다고 머리만 보고, 다리가 아프다고 다리만 고쳐서는 안 되겠죠."

그는 일하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회의 준비에 쓴다고 했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최고위층 임원 회의를 열어 미래 전략을 중점적으로 논의한다. 또 레전드홀딩스 계열 2개 투자회사의 이사장으로 이들 회사가 1000만 달러 이상 투자를 할 경우 결정에 참여한다. 또 레노버의 이사이기도 하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고 응접실 옆의 집무실 창가에 있는 황소 조각상을 가리켰다. 조각상 아래에 '쉬스(蓄勢·힘을 모은다는 뜻)'란 글자가 눈에 띄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 뿔 달린 황소는 힘차게 일어설 때를 대비해서 기운을 모으고 있는 중이지요. 지금의 레노버가 그러고 있듯이." 그가 가슴 속에 또 어떤 넓고 굳센 꿈을 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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